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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죄를 묻는 프랑스

목수정 2012.07.19 조회 수 974 추천 수 0
신자유주의의 죄’를 묻는 프랑스
목수정 | 작가·파리 거주

 

 

 

프랑스텔레콤에 인터넷을 신청했다. 모뎀이 도착했다. 설명서대로 설치했건만 1시간만 작동하고 그대로 멈춘다. 전화로 문제를 호소하고 시키는 대로 해보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네 기술인력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그럼 45유로(약 7만원)를 내라고 한다. 그럴 순 없다고 하니, 그럼 해지하란다. 해지하겠다고 하고, 너네 그러고도 안 망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비슷해서 특별히 망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답한다. 2008년 그러니까 프랑스텔레콤 직원들이 무더기로 자살 행렬에 나서던 그 시절, 우리가 겪은 프랑스텔레콤 직원의 몽롱하고 음울하던 정신상태에 대한 경험담이다. 이윽고 그 동네에 35명이 연쇄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가 접한 대부분의 프랑스텔레콤 직원들은 우울증이라는 짙은 안개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으니까.

 
탁월한 기술력과 완벽한 서비스를 자랑하던 프랑스 국영통신사 프랑스텔레콤은 86년부터 서서히 민영화의 길을 간다. 현재 정부 지분은 27%. 특히 2005년 부임한 디디에 롱바르는 소위 NEXT플랜을 밀어붙이며 3년간 2만2000명을 감원하고 강제로 직종을 바꾸게 하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했다. 큰 자부심을 가진 기술인력을 마케팅부서로 옮기게 하고, 기술인력과 연구예산을 대폭 축소하는 식의 변화였다. 자살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거 공기업이던 프랑스텔레콤에서 일하다가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기술과 서비스를 내팽개치고 오로지 ‘마케팅’에 목숨 거는 회사의 변신을 고통스럽게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회사 경영진에게 남긴 유서들과 노동감시관 실비 카탈라의 보고서에는 이들의 자살이 ‘혹독한 업무환경의 급변에 따른 무기력과 분노’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살인적 경영에 매진하던 디디에 롱바르는 연쇄자살 사태 이후 2009년 물러나야 했고, 신임 사장이 곧바로 구조조정과 NEXT플랜을 중단하면서 자살 행렬은 멈췄다.

그러나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과오는 덮어지지 않는다. 노조는 이 죽음들을 초래한 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정신적 학대’ 혐의로 전 사장을 고소한 것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법적인 공방은 최근 전직 사장뿐 아니라 인사 관련 전·현직 간부들에 대한 전면 소환으로 확대되면서 그룹 전체에 대한 ‘정신적 학대’ 혐의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중이다. 2년 동안 끌어오던 사건을 갑자기 빠르게 진행하며 한줌의 이익을 위해 모욕과 공격, 자괴감으로 노동자들을 몰고간 타락한 자본가들을 향해 칼날을 보여주는 사법부의 행보는 올랑드 정권의 암묵적 지지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2002년 조스팽 정부는 노동법을 통해서 어떤 직장인도 그의 인권과 존엄성에 침해를 당할 수 있는, 직장 내에서 반복적인 정신적 공격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정의하고, 직장 내에서 정신적 학대를 가한 자에게는 1년 이하의 징역과 1만5000유로의 벌금형을 받도록 규정했다. 2000년 출간되어 50만부가 팔린 마리 프랑스 이리고엔의 <정신적 학대(Le Harcelement moral)>라는 책은 그동안 개개인이 구석에서 숨죽이며 감당해오던 수많은 유형의 정신적 학대들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규정하면서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책을 통한 사회적 각성 여파가 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정신적 학대를 이유로 40대 기업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최초의 일이다.

일부 언론만이 이 사건이 갖는 매우 놀라운 시대적 의미를 포착하고 전달했다. 프랑스텔레콤이 걸었던 길. 그 직원들이 자살로서 폭로한 새로운 시대의 자기파괴적 본질은 이미 신자유주의를 사는 모든 세상에 독처럼 퍼져 있다. 감히 칼을 빼들기 시작한 프랑스 법원. 그 칼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시대가 그 끝에서 열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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