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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지부

[영흥] 굴뚝신년회 연대

영흥화력지부 2015.01.05 조회 수 681 추천 수 0

***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굴뚝농성장 연대 ***

 

 - 2014년 마지막날  ~ 2015년 첫날,  쌍용차 평택공장 남문농성장

 - 작년 12월13일부터 70m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응원합니다.

   고공농성 응원 장작보내기에도 참여했습니다.  (장작 2단 15,000원  3510598588683 농협 김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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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고공농성 해고자 아내의 편지
“아직은 울지 못하겠습니다”

 

2014. 12. 27. 토요일

안녕하세요. 이창근 아내 이자영입니다.

쌍용자동차 굴뚝농성장을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저 사람들이 팔 흔들어주면 밑에서 보는 사람들 가슴이 설레고 뛰는지요. 오래 앉아계셔서 추우실텐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한국에는 방문할 계획이 없었던 주앙 펠리세우 국제노총 위원장이 굴뚝농성 소식을 듣고 일정에 없던 한국에 일부러 왔다고 하더군요. 이곳 평택공장과 광화문 씨엔엠 농성장을 찾은 그 분 말씀이 기막힙니다. “18년간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이런 식의 고공농성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라면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고공농성이 쌍용차 한 곳만도 아니고 이미 있었다가 종료된 고공농성도 여럿인데, 한국에 유독 노동자들을 위태롭게 몰아가는 무언가가 있는 건지 생각하며 저도 잠시 아득해졌습니다.

쌍용차 회사측에서 진행한 정리해고는 타당했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고서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사자들인 저희도 말할 것 없이 흐느꼈고 주저앉고 싶었고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있고 이틀 뒤에 있었던 공장 앞 문화제에서 제가 드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번 판결이 우리와 사회에 미칠 영향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번 결정으로 남편 얼굴은 타들어갈 것이고, 돌파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남편은 극단적 투쟁을 결심할 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로 인해 나와 아이는 남편 없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우리의 일상은 긴장으로 조여들 것이다’고 말입니다.

예견이 맞아들었다고 박수라도 쳐야할까요.

굴뚝에 오르기 열흘쯤 전에 남편은 제게 넌지시 농성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남편을 붙잡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써봤지요. 없는 애교도 떨어보고, 남편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음식과 티브이로 붙잡았고, 간절한 기도로 남편을 지켜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굴뚝에 오르던 날 새벽 3시 반, 숨이 차서 헉헉대며 굴뚝에 도착했다고 알려온 남편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며칠 전에 받은 남편 세탁물을 보니 점퍼와 바지 여기저기에 회색 얼룩과 찢긴 자리가 많은 걸 보았습니다. 남편이 쫓기는 기분으로 서둘러 사다리를 올라가느라 벽에 부딪치고 긁히고 했을 게 짐작되었습니다. 다 올라왔다는 남편 목소리에선 무서움을 감내한 긴장과 초조함이 전해져왔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김정욱 사무국장님은 계획을 감행했고, 오늘 농성 15일차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저질러진 일. 흘러가버린 물을 돌리거나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어쩌겠어요,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래서 있는 힘껏 두 남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굴뚝에 오르려한다는 얘길 남편이 꺼냈을 때, 저는 “그럼 남아있는 나와 주강이는?”하고 물었더랬습니다. 돌아오는 남편의 답은 “뭘!” 이 한마디..... 서운하고 속상했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 버렸고 여기에서 원망과 서운함이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얼른 받아들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한참을 붙잡고 있었을 감정과 판단들입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 아빠를 감싸줄 세상 사람은 드물고, 일상을 흔드는 남편을 두둔해줄 세상 사람 또한 거의 없기에 저는 일반적 판단에 기대어 남편을 비난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지만 존중과 응원을 선택했습니다.

그동안의 시간, 그러니까 저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었을 땐 덜했는데, 아이가 태어났는데 쌍용차 사태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하도록 일상이 완전히 파괴되고, 어른조차 정신 못 차리는 상황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가감없이 경험하게 했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칠 듯이 아픈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지난 5년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있는 대로 헤집고 파헤쳐서 할퀴기도 하도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가슴이 메말라있을 땐 사정없이 남편을 물어뜯었습니다. 아이에겐 죄책감으로 무겁고 진지하기만 한 엄마였습니다. 타인의 아픔엔 눈을 감아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상태로 있느냐에 따라 남편과 아이에게 끔찍할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을 땐 숨을 곳 없이 벌거벗겨진 절망감도 느꼈습니다. 동시에 한가닥 희망도 보였지요. 내가 달라지면 되는구나, 내가 노력하면 되는구나, 내가...... 숨이 가빴습니다. 얼굴은 편하지 않았고 생활이 안정되는 느낌은 순간일 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숨 하나 제 마음대로 쉬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릴 때에도 저의 기도는 깎이고 깎여서 이렇게 앙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하느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제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오늘의 상황을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상태를, 남편의 결정을, 사람들의 노력을.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들도, 우리를 방해하는 일들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창근, 김정욱은 세상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지만 마음만은 밑바닥에 바짝 엎드려 낮아지려고 올라가있습니다. 회사더러 당신들의 정리해고 결정은 잘못됐으니 어서 우리를 복직시켜라 하고 요구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더러 당신은 정권의 하수인들이니 꺼져라 하고 비난하러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더러 독재정권, 친자본정권이니 퇴진하라고 욕하러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냥 부탁하러 갔습니다. 대법원 앞에서도 2천배를 했고 발 닿는 곳마다 3보1배도 해보았지만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회사와 동료들 앞에 몸을 낮춘 것은 처음입니다. 당신들 앞에 우릴 낮추니 우리가 내민 손 잡아달라고 부탁하러 간 겁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때론 굴뚝에 밥이며 물품이 올라가도록 조치해준 회사와 기업노조에게 고맙다가도, 고단하고 비참해지면 화도 나고 다 뒤집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일어납니다. 예전 같으면 그랬겠죠. “에이 씨발,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어디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자!”구요.

여기에서 저는 오랜 시간 놓지 못하고 이어왔던 생각 하나를 여러분 앞에 꺼내놓으려 합니다.

여러분, 사건이라는 것이 혼자 일어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일이라는 것이 혼자 일어나던가요? 최소 두 사람, 두 조건 이상이 만났을 때 사건은 일어납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린 흔히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고 가해자는 처벌대상, 피해자는 온정과 도움의 대상으로 가릅니다. 인권도 그렇습니다. 인권을 좁게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 꼼짝없이 갇혀버립니다.

가해자는 가해자로 규정되는 순간 가해자가 될 만한 이유들이 총동원되고, 피해자는 피해자로 규정되는 순간 피해자로 느끼고 피해자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사건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도 엄청나게 많거니와 우리가 통합적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사건은 모두를 상처 입히고 유사한 사건을 계속해서 양산하기도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 사건을 파악하려고 해도 알아내지 못하는 점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신중하게 사건을 알려고 하되,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기에 결국 우리는 그 사건을 통째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최선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저 그 일과 그 일에 속한 모든 이를 존중하자는 겁니다. 사실 나아가면 우리 모두가 그 사건과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된 존재들임을 알고 받아들이자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저는 제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존중합니다. 또한 여러분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존중합니다.

제 친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20대 청춘을 함께 바치고 결혼도 하루 차이로 하고 집을 구해보니 차로 5분 거리에 얻게 되는 등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20년 지기 친구가 있습니다. 한 달 전 11월, 나이 마흔 두 살이 다 되어서 세례를 받게 된 친구인데, 그 친구가 생애 첫 고해성사에서 한 첫 고백이 굴뚝에 올라간 저희에 관한 기도였습니다. 신부님 앞에서 펑펑 울면서 이 가족을 도와달라고 했답니다. 비단 이 친구뿐 아니라 제가 아는 여러 사람들이, 또 제가 모르는 여러 사람들이 굴뚝 위에 올라간 두 사람을 생각하며, 쌍용차 해고자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인들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울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아직은 울지 못하겠습니다. 굴뚝에 있는 남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제가 또 휘청거릴 것 같아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감각을 최대한 둔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덜 느끼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편 5년 전 파업 때 제 모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가슴을 넓히고 인식을 키우는 노력을 순간순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이와 일상을 흔들림없이 지켜가면서 남편을 응원하려 하고 있고, 우리 쌍용차 해고자들의 마음이 공장 안 동료들과 회사에 닿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도 부탁드립니다. 공장과 저희가 연결되길 기도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쌍용차 구성원들이 연결되었을 때 그 다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리에도 이 힘이 전달되도록 응원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 “힘내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요, 계속 듣는 사람 입장에선 좀 벅찰 때가 있습니다. 힘내라는 말 보단, 지켜보겠다, 응원하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로 바꿔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여러분께서 칭찬하고 응원해 주시길 바라는 분들을 소개합니다. 굴뚝농성을 지탱하고 있는 쌍용차지부 동료들과 와락 상근자들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24시간 농성장을 교대로 지키고, 찾아오시는 분들 점심, 저녁을 준비하고 올리는 물품을 준비합니다. 와락에선 물건 준비하느라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세끼 밥을 다른 반찬, 다른 국으로 준비합니다. 이 분들이 없으면 김정욱, 이창근도 없습니다. 이 분들을 많이많이 칭찬해 주세요.

끝으로 남편에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주강아빠! 주강아빠는 나를 믿고 올라갔지? 동료들을 믿고 올라갔지? 동료들은 믿되 나를 너무 믿지는 마.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철의 여인이 아니야. 여느 아내들처럼 남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어. 남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 불리길 기다리고 손잡고 산책도 하고 싶고 차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싶어. 이제 나를 그만 믿고 서로 어깨 겯고 살 수 있게 내 옆으로 와줘. 주강이 아빠로 돌아와 줘~. 부탁이다. 응~

고맙습니다. 얘기 들어주셔서.

추운 날 달려와서 마음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 증명되길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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