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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노동조합 2 (토마스 뮌쩌)

제2발 2012.03.13 조회 수 842 추천 수 0

 

농민해방의 지도자 토마스 뮌쩌

 

교회개혁 하면 루터나 칼빈을 생각하지만 이들과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있었다. 16세기 인물 중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모진 비난을 받아 온 사람이 바로 토마스 뮌쩌다. 그는 1488년 독일 삭소니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정 배경이나 환경은 알려진 바가 없다. 1506년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주의적 학문 분위기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151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희랍어, 희브리어, 라틴어를 배웠다. 졸업 후 수도원에서 규율에 매이지 않는 신부로 있으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를 만났는데 루터는 뮌쩌가 진지한 학구열, 뜨거운 정의감, 행동주의적 기상을 가졌다는 인상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이후 보이디쯔 수도원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요아킴의 묵시적 종말사상과 타울러의 신비사상을 접하였다. 그는 독일신학과 타울러의 저작들 그리고 요아킴의 예레미야 주석을 읽고 교회개혁을 넘어서 혁명적 사회 개혁사상을 확립하였다. 또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역사서를 접하였는데 이 저서가 뮌쩌로 하여금 혁명사상을 갖게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520년 루터의 추천으로 쯔비카우의 성메리 교회 설교 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사상은 변혁이념으로 바뀌어 갔다.

 

쯔비카우는 번성하는 도시였으나 실상은 사회적 혁명의 온상이 되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은광이 있어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당시에 화페의 가치는 하락한 반면에 물가는 상승하였다. 시당국은 세금을 인상하고 방적업은 파산하여 실업자가 늘어났다. 이곳에는 세 집단의 교회가 있었는데 로마카톨릭 교회와 주로 귀족들과 중산층이 다니는 루터파 교회 그리고 광산노동자들과 직물공 등의 하층민들이 다니는 스토크가 영도하는 급진파 교회가 그것들이었다.

 

뮌쩌는 루터파에 속하는 교회 설교자였지만 노동자를 접하면서는 점차 스토그파로 기울었다. 스토크는 본래 상류층에 속한 자였으나 파산당한 일로 현실사회에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급진적인 개혁운동가로 나아가게 하였다. 스토그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뮌쩌는 스토그와 접촉하면서 설교내용이 점점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시당국은 무력으로 뮌쩌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검속하고 뮌쩌를 해임하였다. 1521년 뮌쩌는 사상적 변화로 루터와 결별하고 쯔비카우를 떠났다.

 

뮌쩌는 보헤미아의 프라그로 가서 급진적 혁신을 주장하는 타보르파와 손을 잡고 급진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였다. 그곳에서 뮌쩌는 프라그 선언서를 교회 문에 부쳤는데 그 내용은 하층민들의 가난은 사제들과 지배계층의 압제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프라그 시민들을 루터파에서 급진적 개혁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체포를 피해 1522년 보헤미아를 떠났다.

 

1523년 수도원을 나온 게르센과 약혼을 하고 알스테드의 요한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가난 속에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급진적인 개혁사상 때문에 설교 제한조치를 받고 각종 소동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뮌쩌는 이제 전제군주들과 싸울 것을 결심하고 복음적인 교회 개혁운동보다는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적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는 봉건 체제의 변혁운동을 통해서 자기 이념의 실현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상 때문에 알스테드를 떠났고 이후 농민전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독일의 농민들은 생활 불안정과 불만이 농축되어 100년 전부터 농민전쟁이 있어왔다. 농민들은 노동하는 짐승이나 다름없었고 중과세에 시달려 혁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독일 남부 농민들은 더 심각한 상황에 있었는데 1524년 지방영주에 대한 반란을 계기로 독일 서부와 남부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역사상 보기 드문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되었다.

 

뮌쩌는 인간의 평등과 재산의 공유와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면서 이를 관철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을 정의로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면서 농민들의 단합을 호소하고 혁명군을 조직하고 그 선두에 섰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교회영주들의 학정을 비난하였지만 동시에 농민들의 반란도 옳지 못하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루터는 국가권력에 대해 항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항거라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세속통치권을 빼앗으려는 농민들도 강도라고 규정하였다. 루터는 교회개혁이란 혁명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농민전쟁은 복음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뮌쩌는 종교 문제를 넘어서 농민 대중에 대한 억압에 도전하였다. 뮌쩌는 “가난한 사람들을 곤궁에서 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땅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다...강도 중에서도 국왕과 지배자들은 그야말로 최악이다...이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 박사(루터를 말함)는 그저 이렇게 말한다. ”아멘“. 이 때문에 뮌쩌는 당국의 분노를 샀고 숨어서 지내야 했다. 루터는 제후들에게 뮌쩌를 처벌하라고 촉구하였다.

 

농민들의 폭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삭소니 지방까지 파급되자 루터는 제후들을 비판하면서 정치질서를 파괴하는 폭동은 용납할 수 없으므로 제후들이 나서서 농민들을 진압할 것으로 촉구하였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완전히 영주의 편에 서서 ‘제후들과 관리들이 죽느니 차라리 모든 농민이 죽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제후들이 루터파, 로마 카톨릭파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1525년 봄부터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군은 프랑켄하우젠에서 루터파와 카톨릭파 영주가 이끄는 연합군에 패배한 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525. 5. 27 28세의 나이로 참수당했다. 농민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약 10만 명에 달했다.

 

참고자료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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