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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조운찬 2012.09.04 조회 수 858 추천 수 0

 

폴 스위지(1910~2004)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혹자는 그를 진보 월간지 ‘먼슬리 리뷰’의 창간인 겸 발행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먼슬리 리뷰’에 앞서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이었다. 1942년 쓰여진 이 책은 지금도 마르크스 경제학 입문서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1970~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포돼 읽혔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책을 독서 목록에 넣어 읽고 토론했다. 당시만 해도 번역이 안됐던 터라 학생들은 이 책을 그냥 ‘스위지’라고 불렀다. 스위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과 동의어였다. (책은 2009년 필맥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내가 ‘스위지’를 기억하는 것은 선배 황정하 때문이다. 그는 스위지의 탐독자였다. 키가 훤칠하게 컸던 그는 양복 윗옷 주머니에 스위지 제록스판을 넣고 다니며 보았다.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사전도 없이 술술 읽어냈다. 당시 서울 성수동에서 노동야학 교사로도 활동했던 그에게 ‘스위지’는 노동 현실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였던 것이다. 대학 졸업을 3개월여 앞둔 1983년 11월 황정하는 학생 시위를 주동하다 도서관 5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는 시위에 앞서 경찰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 스위지 책은 한 후배가 전해받았는데, 그의 유일한 유품이 됐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제사상에 이 책이 놓인다.

유신과 전두환 군사정권시대에 카를 마르크스는 최대 금기어 가운데 하나였다. 마르크스의 저서는 모두 금서였고, 책을 소지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 원전을 접할 수 없었던 대학생들은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과 같은 <자본> 해설서를 집어들었다.

1988년 출판물 해금 조치로 <자본>은 빛을 보았다. 이듬해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자본론> 완역본(비봉출판사)을 내자 도서출판 이론과실천은 곧바로 독일어 원본을 번역한 <자본>을 선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판 <자본론>도 수입돼 번역본 경쟁이 치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년 뒤 소련이 붕괴하면서 <자본>에 대한 관심은 금세 시들해졌다. 공산권의 몰락을 자본주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들 했다. <자본>이 설자리는 없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용도폐기될 것만 같았던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다시 <자본>을 주목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비정규직, 워킹푸어들이 늘어나면서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2010년엔 독일어판 <자본>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이어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 강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류동민),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자>(강신준) 등 <자본> 입문서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주에는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아케가미 아키라),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김수행)가 출간됐다.

때맞춰 경향신문은 주말기획으로 ‘오늘 <자본>을 읽다’를 내보내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 <자본>을 독자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는 언론 사상 초유의 시리즈가 될 듯하다. <자본>은 어려운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학자들 가운데에도 완독한 이가 매우 드물다. 이 때문에 종합일간지에 <자본> 강좌를 싣는 게 옳으냐는 반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숨막힐 듯한 작금의 현실은 <자본>이라는 ‘무기’를 필요로 한다. 작가 공지영은 최근 펴낸 <의자놀이>에서 22명의 죽음을 가져온 쌍용자동차의 무법천지와 음모 앞에서 “이 사회가 정상이냐”며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23, 24번째 희생자를 부르는 의자놀이를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 <자본>을 보면 쌍용차 자본주의의 음모를 읽을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무기력에 빠져 죽어가는 노동자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경향신문 <자본> 연재를 맡은 강신준 교수는 20여년간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자본> 전문가이다. <자본>을 완역하고 시민·대학생을 상대로 <자본>을 강의해온 강 교수는 지상강좌를 통해 독자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을 전해준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지상강좌를 접한 독자들은 강 교수의 친절한 강의에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 교수는 <자본> 연재를 시작하며 “노동자들이 집집마다 <자본>을 곁에 두고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신문 연재가 <자본>을 읽는 데 길라잡이가 됐으면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스위지’와 같은 시중의 정치경제학 입문서가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지금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시대인가를 늘 생각했다”고 썼다. 독자들에게 이 같은 문제의식만 전달돼도 <자본> 지상강좌는 성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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