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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원 식당 노동자의 수기

각성하라 2012.04.17 조회 수 1003 추천 수 0

해고된 식당노동자 수기


잔업을 마치자 마자 하루 동안 혼자 있었을 딸을 생각해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합니다.
하루 종일 물을 만진 저의 손은 퉁퉁 부어있습니다. 갈라진 손끝에는 반창고를 칭칭 감아놓아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병원 지하 식당에서 일해도 한 계단만 올라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들고, 무섭게 쏘아보는 상사의 눈치를 보며 감히 치료받고 오겠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문을 굳게 잠그고 혼자 있는 영희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다 아이는 잠이 듭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잠에서 깬 영희는 왜 이렇게 늦게 왔나며, 저에게 와락 안깁니다. 하지만 영희를 따뜻하게 안아줄 새도 없이 굶고 있었을 아이를 생각하며 저녁을 준비합니다. 영희는 그림을 보아달라며 저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몸도 피곤하고 집에서 해야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급한 마음에 영희에게 화를 냅니다.

영희는 엄마가 밉다며 울기 시작합니다. 영희의 눈물을 보고서야 엄마가 잘 못했다고, 영희의 눈물을 닦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시간이 흘러 영희가 대학을 졸업합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반듯하게 성장한 영희가 엄마는 대견스럽고 기특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월이 스치듯 떠오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과거의 고통보다 딸아이의 졸업식에 함께 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졸업식 전날 영희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영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았던 엄마의 손은 여전히 부어있고, 갈라져 있습니다. 영희가 저의 손을 곱게 감싸고 머리를 숙여 뜨거운 눈물을 한 없이 쏟아 냅니다. 그렇게 모녀는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영희가 먹을 밥을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걸어서 5시까지 병원으로 출근합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한 요즘 영희를 혼자를 두고 나오는 저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직원들의 식사를 걱정하며 수십년 동안 이른 출근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청춘의 열정을 병원에서 다 보낸 저는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부족하거나 넘침 없이 인생의 노년을 살아 갈수 있을 꺼라 믿었습니다. 

1990년 후반 대한민국 경제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고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지하 식당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내 자신과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병원에도 위기의 바람은 불어 왔습니다. 병원은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 빠져 있는 만큼 병원 운영 정상화에 모든 직원이 일떠나서야 한다. 그리고 고통분담을 같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고서 직접 운영하던 식당과 관리하던 직원들을 1999년 12월 1일 외주 용역업체에 맡겨 버렸습니다. 병원 책임자는 용역업체에 소속되더라도 종전대로 일을 한다. 어머님들은 예전처럼 계속 일을 하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용역업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바뀐 사람도 없고, 같은 일을 하고, 작업 지시를 받으니 별일 아니 구나 생각하였습니다.

2007년 (주)아워홈이라는 국내 1위 푸드 업체가 들어오기 전까지 두 차례 업체가 바꼈습니다. 업체가 바뀔 때마다 계약서를 써야 했습니다. 급여도 예전과 달리 최저 인건비에 달하는 쥐꼬리만 한 돈을 받아야 했습니다. 위기 난리 통에 아무런 고민 없이 덜썩 병원말만 믿고 용역업체로 변경한 자신을 탓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꼬부랑 할머이 처럼 보이는 자신을 누가 일을 시키겠냐며, 조금 이라도 병원식당에서 일을 더하자며 스스로를 위로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업체가 들어 온 뒤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루 기본 근무에 매주 수십 시간의 잔업이 사람을 질리게 했습니다. 새로운 업체는 잔업수당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작업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제공하지 않고 직접 구입해서 쓰게 하였습니다. 일을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서 먹는 점심풍경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집니다. 밤에 잠을 자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신경성 소화 장애 및 두통이니 약을 복용하는 것보다는 고민이나 문제를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풀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병을 치료하려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가 더 아퍼옵니다.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영희는 아픈데 없이 공부잘하고 있는지 먹고싶은건 없는지 물어보려 딸아이의 전화 번호를 눌러 봅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딸에게 방해가 될까봐 이내 전화기를 다시 주머이에 넣었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일만 하던 저와 동료들은 같은 고민으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일만 실컷 부려먹고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살찌운 용역업체가 병원에서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해 동료들은 병원 측과 용역업체에 밀린 잔업수당 지급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하였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피가 타들어가는 듯 한 고통 속에서 모임을 진행하고 대책을 연구해봤지만 뾰족한 수를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뉴스에서 파업하는 또 다른 여성노동자들을 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거리에 쫓겨난 여성 가장들이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뉴스였습니다.

저는 망설였습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왜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새로운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앉아서 당하느니, 당당하게 요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며 2011년 7월 한일병원 분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딸에게 전화하였습니다. 무슨 일 있냐며 묻는 딸에게 엄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엄마도 대한민국의 당당한 노동자다. 엄마는 이제부터 밟아도 꿈틀대지 않는 무지렁이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권리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딸에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어제는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제가 오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입니다.

나이든 여성이라고 무시하고 얕잡아 봤던 병원과 용역업체는 노동조합을 결성한 우리 들의 변화에 굉장히 당황해하였습니다. 우리는 노동조합 결성에 멈추지 않고, 노동청과 노무사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한 푼도 받지 못한 밀린 잔업수당도 받아냈습니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할줄 알았던 저와 동료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만세의 함성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날 밤 기쁨에 겨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용역업체가 나가고 새로운 업체가 들어오던 날 저와 동료들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2012년 1월 1일 모두 해고자가 되었습니다. 해고 소식을 전혀 모른 채 마지막 날까지 잔업을 했던 저와 동료들은 다음날 굳게 닫혀 있는 지하 식당 앞에서 망연자실해졌습니다.

수십 년을 병원의 발전과 환자들의 식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느라 청춘을 모두 바쳤는데, 병원은 입을 틀어막고 답변하나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개인 사물함까지 모두 뒤지고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렇게 저와 동료들은 병원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닌 사용연한이 지난 폐기물로 취급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던 새해 첫날부터 60여일이 다 되도록 저와 동료들의 활동은 멈춤 없이 진행 되고 있습니다. 환자들도 직원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도봉 강북의 유일한 종합병원인 한일병원의 만행에 수많은 주민들이 서명과 지지 방문으로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2월 29일)은 해고 된지 60일이 됩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며 흔들림 없이 싸워나가고 있는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이 지난 활동을 되돌아보고 더욱 결심을 높이고자 목숨만큼 소중한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삭발이 맞냐? 아니냐?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환갑을 눈앞에 둔 제가 삭발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가? 입니다. 정치인,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개인등 어머님들의 눈물 어린 투쟁에 연대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분들이라면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환갑을 눈앞에 둔 저와 동료들의 부당해고 철회,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는 눈물겨운 투쟁에 함께 해주십시오. 한일병원 정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부당해고 철회,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는 한 중년 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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