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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용산참사 철거민' 민중열사 범국민장

노동조합 2010.01.11 조회 수 1296 추천 수 10
















[참세상 기사]

5명의 철거민 열사들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떠나는 날은 끝내 유족의 눈물을 감추어 주듯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9일 정오부터 시작된 용산참사 영결식과 행진, 노제는 서러울 정도로 길었다. 경찰은 고인들의 마지막 행진조차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경찰은 열사들이 활짝 웃으며 부활을 하라는 대형 걸개그림인 부활도를 가지고 행진을 할 수 없다고 막기도 했고, 차선 때문에 행진 도중 계속 트집을 잡았다. 이날 영결식과 노제에는 5천여명이 참가해 죽은 철거민들의 마지막 길에 명복을 빌고 진상규명을 다짐했다.

양회성 열사님, 윤용헌 열사님, 이상림 열사님, 이성수 열사님, 한대성열사님...
서울역 영결식장은 이강실, 조희주 상임장례위원장의 조사를 통해 다섯 철거민 열사들의 마지막 이름이 울려 퍼졌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호되게 이명박 대통령을 꾸짖었다.
“간밤에 가슴이 떨리고 주먹이 떨려 잠을 못 이뤘습니다. 언론에선 용산참사라고 하는데 이것은 용산학살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학살한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명박 대통령이 나와 ‘국민여러분 제가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여 사죄의 큰절을 올려야 합니다. 용산에서 아무 죄도 없는 시민을 함부로 학살 했으면 폭도니 테러니 하는 수작을 없애고 누명을 벗겨야 합니다. 저는 다섯 분의 열사를 내 마음에는 묻겠지만 삽질은 못하겠습니다. 우리가 진짜 묻어야 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조금 있으면 설날인데 그날 떡국이나 한 그릇씩 나누고 싶은데 열사여 정말 원통합니다. 정말 원통 합니다”

김정환 시인은 “서울특별시 용산 4지구, 남일당, 355일, 쉿, 쉿, 바람소리, -산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라는 조시를 낭독했다. 그 사이 고 이상림 열사의 며느리 정영신 씨는 다시 감옥에 들어갈 남편 이충연 씨 옆에서 서럽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버지 영전에 절 한번 올리지 못한 우리 막내도 감방에서 잠시 돌아와 상주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개월이 지나도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아이들도, 군대와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텅 빈 영안실도, 뻥 뚫린 가슴도, 조금이나마 채워졌습니다.

고인들을 더 이상 차가운 냉동고에 둘 수 없어서 힘든 결심을 한 유가족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 했지만, 지난 1년 전 고인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붙인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이 참으로 편치 않았습니다. 고인들의 육신은 땅에 묻어드릴 수 있겠지만, 테러범,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땅바닥에 떨어진 고인들의 명예는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어미의 마음은 곧 동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알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저 높은 망루에 올랐던 동지들이 오늘도 감방에 있습니다. 저희 유가족은 오늘 고인들을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진실을 밝혀서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세요. 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차가운 감방에 갇힌 내 아들, 우리의 동지들이 하루빨리 무죄로 풀려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주세요. 그리고 우리와 같은 철거민들이 이 땅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해 저 위태로운 하늘 끝 망루로 오르는 일이 없도록 이 잘못된 재개발을 바로 잡아 주세요. 없는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세요”

영결식은 야4당 대표,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의 조사와 박준, 안치환의 조가, 김미선 씨의 진혼무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2시 30분께 분향과 헌화를 마치고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로 추모행진을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용산까지는 버스로 4정거장 정도의 거리였지만 행진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100여개의 만장과 5명 열사의 대형 영정, 부활도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하려 하자 하늘에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온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차선확보를 놓고 경찰과 실랑이를 하면서 가야 했기에 행진은 늦어졌다. 특히 노제가 예정 된 남일당을 100여 미터 앞두고 행진은 30여 분간 중단 됐다. 노제를 하기 위해 대형 무대차가 들어와야 하는데 경찰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결국 노제는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의 사회로 어둑해지기 시작 할 때 시작했다. 눈은 점점 많아 졌다. 어느새 무대 맨 앞에 앉아 있던 유족들의 머리와 어깨는 새하얗게 눈이 쌓였다.

노제에서 유족들은 무대에 올라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유족 대표로 고 이성수 열사 부인 권명숙 씨가 나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동안 하도 많이 울어서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있을까 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지만, 냉동고에 계실 때는 시신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사진과 기억으로밖에 볼 수 없는 당신...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당신...장례를 치르고 1년 만에 집에 돌아간다 한들 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애 아버지 없이 어떻게 생활을 이어갈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돌아갈 집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용기를 주셔서 정신과 치료를 마치면 빌딩 청소라도 해서 아이들 가르치겠다고 굳게 마음 먹어봅니다. 하지만 텅 빈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내 남편,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쉽사리 씻을 수야 없겠지요.
용산을 뒤로 하고 떠나려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남편의 원혼이 서린 남일당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이렇게 정리하고 떠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호시탐탐 저희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을 보면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우리가 용산을 떠난다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곳을 부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겠지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 이곳에 살았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용산을 만들겠지요.
이제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아서 너무 다행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까 두려웠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 저희 유가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범대위,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 국회의원님, 문화예술인, 레아식구들, 용산을 잊지 않은 시민들... 지난 1년간 이 나라 정부가 버린 저희들을, 집도 절도 갈 곳 없는 저희들을, 따뜻이 보살펴주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 유가족도 여러분 믿고 끝까지 싸워서 그 고마움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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