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한겨레] “FTA, 미국에 유리…더 얻으려 재협상 요구할듯” 한-미 경제학자 대담

노동조합 2008.05.28 조회 수 1641 추천 수 0
“FTA, 미국에 유리…더 얻으려 재협상 요구할듯”
[한겨레 창간 20돌] 한-미 경제학자 대담 ‘이명박 경제’를 진단한다  



  서수민 기자

<한겨레 기사 바로가기>

  

» 한-미 경제학자 대담 ‘이명박 경제’를 진단한다

한국과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계를 대표하는 두 학자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두 나라의 경제현안들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경북대 이정우 교수와 미국 하버드대 리처드 프리만 교수는 시장 만능주의와 섣부른 규제완화의 위험을 경고하며, 사회적 합의를 통한 성장과 분배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대담은 지난 19~20일 이틀에 걸쳐 프리먼 교수가 일하고 있는 미국 보스톤 인근 캠브리지에 있는 전미경제연구소(NBER) 사무실에서 4시간여동안 진행됐다.

■ 두 경제학자는…

리처드 프리먼(하버드대 경제학과·65) 교수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로, 학계와 행정부를 오가며 주요 경제 정책의 ‘브레인’ 구실을 해 왔다. 모교인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와 예일대, 런던정경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해 온 그는 국제 노동기준과 노동자 경영참여, 정보기술을 통한 노동운동의 진화, 여성과 유색인종 노동자 문제 등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 300여편 이상의 논문과 30여권 이상의 저서를 내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정우(경북대 경제통상학부·58) 교수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하버드대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책위원장을 역임했다. 참여정부의 ‘동반성장론’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2005년 7월 정책실장에서 물러난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을 비판하는 진보 학계의 선두에 서 있다. <소득분배론>(1997), <한국의 사회문제>(2000) 등이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 리처드 프리먼(오른쪽)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와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전미경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FTA세부사항 정치자금 대는 기업이 좌우
농·축산·제약업 등 한국쪽 불이익 뚜렷해


이정우 교수(이하 이)
=현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한국이 뜨겁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당시 미국 노동계는 나프타를 반대했는데.

프리먼 교수(이하 프) =나프타의 효과가 과장됐고, 정부가 추진 당시 약속했던 효과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효과가 있었더라도 미국 경제 규모에 비해 작은 요인에 불과하다. 나프타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를 폐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의외로 무역 문제에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나프타와 중남미 국가들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 모두 특정 산업의 이익을 반영하는 로비스트들이 협상 내용을 좌지우지했다. 시민들의 이익은 반영되지 않았다.

이=앞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미 의회에서 비준될 것이라고 보나? 또 오바마와 힐러리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고 있는데,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폐기될까?

프=민주당 대통령이 당선되면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으로 더 챙기려고 하지, 폐기는 안할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이미 미국한테 유리하게 협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이 좀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부분적인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나프타 때에도 그런 식의 추가협상을 요구해서 노동 분야에서 부수적인 이익을 챙긴 전례가 있다.

이 협정은 편향된 내용일 것이고, 아마 한국에 불리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협상 조건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서 협상에 임하는 사람들은 막강한 변호사들로, 미국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관철해내고야 마는 이들이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이들은 업계의 로비스트들이다. 자유무역협정이 ‘자유’ 무역을 가능케 하고, 경제학 교과서처럼 양국에 이익을 준다는 것은 세부 협상내용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세부 사항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세부 사항들은 정치 자금을 많이 주는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매우 정치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한국의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는 저서에서 ‘악마는 각론(세부사항)에 숨어 있다’는 표현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이 쌍방에 이익을 준다고 총론적으로 말하지만, 막상 부문별로 따져보면 이익을 볼 산업이 별로 없다. 그 대신 한국의 피해는 농업, 축산업, 제약업 등에서 너무나 분명하다.

프=몇 년전 호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굴욕’이라고까지 불렀다. 자유무역의 대전제는 양쪽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호주 같은 선진국조차 협상에서 미국에게 밀렸고, 협정문은 미국 쪽 이익에 치우친 것이었다.

이=그래도 호주가 2004년 미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에는 ‘투자자-국가 제소제’를 제외하는 성과가 있었다. 투자자-국가 제소제는 호주에서 사업하는 미국 기업이 법률, 정책 등을 이유로 사업에서 손해를 봤다고 판단할 경우 호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손해를 배상받는 제도로서 나라의 정책주권이 흔들리는 심각한 문제다. 호주의 전례가 있었던 만큼 한국은 미국과의 협정에서 이를 뺄 수 있었을텐데 빼지 못한 것은 엄청난 실책이다. 물론 투자자-국가 제소제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게도 대칭적으로 작용하지만, 국가간 힘의 비대칭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한때 대통령의 참모였던 내가 공개적으로 한-미 에프티에이를 반대한 것도 주로 이것 때문이다.

프=악마가 각론에 숨어 있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미국이 북미, 중남미 국가들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아시아산 의류의 수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 결과 멕시코와 중남미 사람들은 미국산 의류를 수입했고, 이는 미국 의류회사의 이익만 늘려줬다. ‘자유무역’이라는 그들의 말을 무조건 믿지 말고, ‘정확한 규칙이 무엇이며 누가 혜택을 보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한국 경제학자들은 대개 미국에서 훈련을 받아 미국 경제학의 사고에 깊이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그런 사고방식이 낳은 작품이다. 감세와 노동 유연성 강화,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요약될 수 있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어떻게 보는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프=한물간 정책이다. 1990년대 그런 정책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후 여러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 선고를 받았다. 오늘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시장만능주의는 안된다고 말하며, 노·사·정이 힘을 모아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정권에서 정부의 계획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이와 반대로 시장만을 믿고 규제를 완화하는 것도 답이 아니라는 결론 역시 역사에서 배웠다.


노동유연성 강화·규제완화 등 한물간 정책
세계은행조차 노·사·정 합의 중요성 지적


이=이명박 대통령의 경제 보좌진은 1980~1990년대 미국에서 경제학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1990년대 세계은행이 각국에 민영화를 요구했지만 그 뒤 그 한계를 인식하고 민영화 신념을 접은 것을 모른다. 이들은 과거 한때 유행했던 감세, 규제완화, 민영화를 여전히 신봉하며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만을 하고 있어 대단히 걱정스럽다.

프=시장이 만능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시장을 이용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경제학자들의 목소리를 대통령이 들었으면 한다. 경제학자가 아니라면 유권자들이라도 말해야 한다.

이=또 다른 현안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도산한 기업에 160조원이나 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그런 기업에서 노사는 10여년간 합심해 쓰러진 회사를 살려냈고, 기업가치를 키워낸 경우가 많다.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수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제 기업 매각을 앞둔 상황에서, 노조를 논의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노조 입장에서는 일자리 유지와 향후 노사관계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말이다. 프랑스나 미국 등에서는 기업 매각에 노조에게 주식 할인매각 등 각종 특혜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프=물론이다. 미국은 기업 지배권을 노동자에게 넘기는 회사에게 세제 혜택을 준다. 자신의 일터에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직장이 망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 위험한 행위인데, 이를 자임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면 회사로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미국에서 노동자에게 주식 지분을 주는 회사들은 노사관계 뿐만 아니라 생산성과 수익성 등 여러 면에서 좋은 성과를 보인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이=한국의 경우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들의 가치가 너무 높아 노동자들이 기업 자체를 인수하기는 어렵다. 노조가 원하는 것은 투기자본이나 노조에 적대적인 기업에 매각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우조선해양, 한국델파이 등의 경우 정부는 노조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협상 테이블에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회사를 살려낸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외톨이가 돼버렸다. 노조를 매각 당사자 중 하나로 간주해 견해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거창한 경제이론을 들먹일 필요가 없는 상식이 아닌가.

프=노동자에게 일자리는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다. 더욱이 다수의 일자리가 걸려 있는데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공적자금이 투입됐다는 것 자체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내포된 것 아닌가. 고로 정부는 그 원칙을 이어나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조의 신뢰를 얻는 것은 기업 이익 증대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노조가 오랜 세월 고용주와 계약을 맺어왔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고, 회사의 주인이 바뀌더라도 당연히 승계돼야 한다. 물건을 사고 팔 때도 기득권이 인정되는데, 하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없던 것으로 묵살할 수는 없다. 노사관계는 일종의 재산권으로 간주해야 한다. 노동자 보호가 매우 약한 미국에서조차 회사의 주인이 바뀌어도 기존 단체협약은 당연히 승계돼 왔다. 심지어 마가렛 대처 총리 시절 영국에서도 단체협약은 승계됐었다.

이=한국의 병든 노사관계는 여전히 치료해줄 의사를 찾는 중이다. 그 길에 산별교섭으로 전환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현재의 기업별 교섭은 소수의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임금과 혜택을 독식하는 이기적 게임이다. 그러나 산별교섭을 할 경우 노동자들 역시 국민경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임금 인상 역시 자제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가들은 산별교섭이 자기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과격한 사태를 두려워하여 케케묵은 기업별 교섭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노사관계를 더 나쁘게 하고, 임금비용을 더 상승시키고 있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IMF도 시장만능주의 경고…민영화는 실패선고 받아”

프=한국같이 기업별 교섭을 고수하는 경우, 노동자들의 임금을 회사의 성과에 연동시키는 ‘동반자본주의’(Shared Capitalism)적 접근이 효과적일 것으로 본다. 임금의 일부를 회사의 주식으로 지급해, 노동자가 의결권을 행사하든가 혹은 배당금을 받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에는 관련 법규가 이미 있고,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총임금의 2%를 배당금 형태로 받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회사가 잘 되면 노동자들이 더욱 이득을 보고, 회사가 어려우면 돈을 덜 받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미국 영리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46%가 임금의 일부를 주식 혹은 배당금으로 받고 있다. 임금대비 비율은 5~10%가 될 것이다.

이=노사는 원래 동반자가 아닌가. 임금의 일부를 회사의 이익배당이나 주식의 일부로 받는 것은 노동자로 하여금 회사에 대한 일체감을 높이고, 생산성을 높인다는 연구가 많이 있다. 미국의 고성과 기업을 보면 노동자 참여적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다. 특히 미국, 한국에 많은 신기술 기업, 벤처기업에서 이런 실험은 더 성공적인 게 아닌가.

프=그렇다. 이런 방식은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전통적 부문의 노사관계 변화가 어렵다면, 최소한 다음 세대를 위해 문이라도 열어줘야 한다. 어차피 전통 산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줄어들고 있다.

이=당신은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의 노사관계 개선을 위한 던롭위원회에서 노사관계의 틀을 다시 짜는 보고서 작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 뒤 미국 노사관계의 변화가 궁금한데.

프=상황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화당이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며 우리의 제안을 묵살했다. 또 미국의 상급 노동단체가 한국처럼 두 개로 쪼개지며 힘을 잃었다. 그러나 노조의 변화와 혁신으로 새로운 성과도 있었다. ‘워킹 아메리카’(Working America)라는 노조 아닌 노조가 대표적이다. 이 조합은 비록 교섭권은 없지만 과거 목소리가 없었던 이들을 대변하며 노동자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소속감과 대표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이=미국 같이 노조에 대한 반감이 큰 나라에서 노조에 계속 집착하는 것보다는 노조를 우회하는 전략이 참신해 보인다. 비슷한 상황인 한국에 시사하는 바도 있는 것 같다. 워킹아메리카 조합원들은 공식통계에서 노조원으로 집계되는가?

프=나는 그들을 조합원으로 보지만 정부와 공식 노조 통계는 그렇게 집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계 노조원’(Union Affiliate)으로 불린다.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여전히 11%로 간신히 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공공부문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가입률이 약간 올라갔다. 미국 최대 노조인 전미산별노조연맹(AFL-CIO)은 워킹 아메리카가 200만명이나 가입시킨 데 매우 놀랐다. 새로운 형태의 ‘노조 아닌 노조’인 워킹 아메리카는 노조우회 전략이다. 노조를 싫어하는 기업들을 피해 단협 없는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현재 회원이 200만명인 워킹 아메리카가 장차 400만, 1천만명으로 불어나면 전체 노조원이 1100만명에 불과한 미국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노조 아닌 노조가 개별 기업을 찾아가 “나는 1천만명이 가입한 노조의 대표다. 교섭권은 없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참고로 우리와 협상을 하지 않으면 회원 1천만명에게 귀사의 상품을 보이콧하라는 이메일을 돌릴 것”이라고 말하면 미국의 어느 기업이 이를 무시할 것인가. 이는 미국 기업이 미국은퇴자협회(AARP)의 3천만 회원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런 ‘노조 아닌 노조’의 회원이 늘어날수록 미국은퇴자협회 같은 막강한 조직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이=워킹 아메리카 같은 교섭권이 없는 조직은 어떤 일을 하나?

프=단체협상이 아닌 단체협상을 할 수 있다. 정부의 최저임금 협상 등 주요 사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조합원 중 다수가 최저임금이 올라가야만 임금이 올라갈 수 있는,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아직 워킹 아메리카는 기존 노조 같은 임금교섭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지만 장차 덩치가 커지면 자연스레 교섭권이 생길 것이다. 월마트의 노동자 5만명을 대표한다면 공식적인 교섭권 없이도 노동자들의 의료보험 개선 등에 압박을 넣을 수 있지 않겠나. 일례로 미국은퇴자연합은 교섭권이 없지만 회원이 3천만명에 이른다. 은퇴자 관련 복지정책 축소 움직임이 포착되면 이들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워싱턴 정계의 그 누구도 함부로 이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지난해 네델란드 노총을 방문했을 때 심지어 자영업자들까지 산별조직화하는 창의적 노력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자영업이 엄청나게 비대하므로 이는 중요한 시사를 준다. 워킹아메리카도 그런 느낌이다.

프=그렇다. 새로운 노조는 과학기술을 이용해 저렴한 기술로 조합원들에게 서비스를 제안하는 등,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응용이 가능하다. 나는 인터넷으로 조합원들에게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개방형 노조’(Open Source Union)를 제안한 바 있다. 미국은퇴자협회의 연간 회비도 25달러로 매우 저렴해 가입이 용이하다. 워킹 아메리카는 조합원을 모집하는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많은 노동자들이 교섭권이 없더라도 자신들을 대표할 조직에 가입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세대는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자식 세대가 일하는 새로운 부문에서는 ‘노조우회 전략’(Detour Strategy)이 필요하다.

이=한국 기업가들도 미국만큼이나 노조를 싫어하므로 노조우회 전략은 상당한 참고가 될 것 같다. 사실 노조가 생산성 향상, 애사심 고취 등 플러스의 효과를 갖는데, 기업가들은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우회전략은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 한국은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임금 차별도 심하지만, 아직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비정규직의 차별과 소외는 더욱 깊어만 간다.

프=한국 비정규직은 워낙 방대한 규모라서 연구가 필요하다. 사회보장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는데, 한국같이 잘 사는 나라에서는 결국 세금을 더 걷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사회적 혜택을 늘리는 길이 최선책이라고 본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 노력에 동참해야 하며 양보도 필요하다.

이=그렇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세금을 더 내기 싫어한다는 것이 딜레마다.

프=그러면 어렵다. 미국인들도 세금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한국인들과 비슷하지만,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포착된다.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같이 매우 부유한 이들이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러나 세금을 어떻게 더 걷는 복잡한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모든 국민이 보편적으로 향유할 사회적 서비스에 대해 먼저 합의를 도출하고, 그 다음 재원을 찾아야 이를 성사시킬 수 있다.

이=미국의 ‘책임있는 부자’ 운동은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논의가 활발하다. 사회적 합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의 노사관계 개선, 사회적 서비스 확충, 적절한 세금에 대한 합의를 위해서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합의 도출이 긴요하다고 보는데, 이를 위해서 유럽식 단합주의가 한국이 취할만한 모델이 아닐까?

프=사회적 합의를 위한 기구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그러기엔 한국은 노사합의가 잘 안 되고, 인구가 4800만명으로 너무 많다.

이=한국에는 인구가 많고, 노조가 약하고, 진보정당도 약하지만, 다른 나라보다 강력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부터 매 3년마다 사회협약을 맺으며,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생산성을 올리며 연평균 4% 이상의 고도성장에 성공했다. 역사적으로 원한이 많은 영국을 앞질러 소득 3만불 달성에 성공했고, 그걸 기념하는 첨탑이 더블린에 서있다. 이러한 아일랜드 사회 협약에는 농민, 여성 등 각종 사회단체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프=하지만 사용자 쪽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스웨덴 등 유럽에서 이뤄진 사회적 합의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높여줄 것이라고 본 고용주들의 의지가 작용했지만, 한국의 사용자들은 사회적 합의 틀 내에서 협상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또한 국가의 크기 역시 여전히 중요하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같은 학교를 나와 서로를 개인적으로 잘 안다는 것은 협상에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 작은 아일랜드가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이=그러나 한국의 기업가들도 사회적 합의가 기업경영과 국가경쟁력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합의 모델에 동의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경제를 살리는 길이 그것이라면 결단을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 협조의 위력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외환위기 뒤 노·사가 협력해 살려낸 기업들
매각 논의 때 노조 목소리 배제해선 안돼


이=그럼 주제를 미국경제로 바꾸어보자. 매년 심해지는 미국의 양극화 현황은 어떤가? <타임> 최근호 표지기사는 미국의 소득 최상위층의 집중도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프=미국의 소득 양극화는 악화일로를 걷다가 최고수준에서 더 이상 악화하지는 않는 일종의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 노숙자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지니계수는 1990년대 후반 경기 호황으로 잠시 개선됐지만 이후 큰 변화가 없다. 물론 최상위 부자들의 자산 총액은 30~40년 새 크게 늘어났다. 그 안에서도 상위 1% 소득의 80%는 상위 0.1%가, 상위 0.1% 소득의 80%는 상위 0.01%가 독식하는 등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있다. 성공적 헤지펀드를 운영한다면, 한 해에 20억~30억 달러를 쉽게 벌 수 있다. 헤지펀드의 운용 수수료는 2%이고, 수익을 낼 경우 20%를 보너스로 가져간다. 원금을 까먹어도 편드 회사가 보는 손해는 없으니 어떻게 해도 돈을 버는 구조다. 오늘날 대부호들의 재산이 너무나 크다 보니, 과거에는 부자들의 재산을 빈자에게 재분배해도 별 효과가 없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부자들의 세금만 잘 걷어도 빈곤층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

이=부시 행정부 시절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던 것 같다. 특히 부시가 줄기차게 추진한 감세 정책은 빈부격차 심화에 더 불을 지른 게 아닌가?

프=영향을 주긴 했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전 수입에서 이미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2000년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재정 흑자를 미국의 모든 남녀노소에게 동일 액수를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공화당이 엄청난 재정흑자를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에게 나눠주는 데 분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선례도 있다. 석유로 엄청난 재정흑자를 보이는 알래스카에서는 해마다 납세 여부나 남녀노소 상관없이 주민에게 균등하게 돈을 나눠준다. 최근에는 1인당 1500달러로, 4인가족은 6천달러를 받았다. 지금 부시 정권이 공황을 막기 위해 미국인들에게 나눠주는 세금 환급도 이와 일정부분 유사하지만, 대상을 납세자로 한정한 점이 다르다. 물론 지금 미국의 재정도 바닥이 나 균등하게 나눠줄 재원도 없다.

이=경제학자 파리스(Van Parijs)가 제안한 기초소득(Basic Income) 제도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흥미 있는 제안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을 클린턴 정부 때 노동부장관 로버트 라이히도 한 적이 있다. 재분배 정책 중에서 노동의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빈민을 돕는 좋은 정책인 것 같다. 언젠가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부시 정권이 이런 정책을 채택할 리는 없지 않겠나.

프=사실 부시 정권은 부의 재분배에 관심이 매우 많다. 부유층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재분배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가난한 사람의 돈을 부유층에게 나눠주려는 게 부시의 생각이다. 농담이 아니다. 클린턴 정권도 문제는 많았지만, 최소한 빈부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는 했다. 클린턴 정권 때 근로장려세제(EITC)는 매우 진지한 노력이었다. 근로장려세제는 영국과 캐나다,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에서 성공을 거둔 검증받은 정책이다. 특히 최근 시장친화적 방식으로 빈부격차를 줄이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나라로 싱가포르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의 근로복지(Workfare) 정책과 소득보전(Income Supplement) 계획이 성공할지 주목된다. 싱가포르는 이런 소득세 공제 대상을 비공식경제와 자영업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노무현 정권 때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근로장려세제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이제 시범사업 단계를 지나 본격화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제도를 도입할 때 경제부처 장관을 비롯한 시장주의자들은 의구심을 품고 소극적이었다. 사실 이런 정책이야말로 시장친화적 빈곤대책인데도 말이다.

프=미국에서 근로장려세제는 실은 공화당의 빈곤퇴치 정책으로 시작했다. 닉슨 정권 당시 공화당은 최저임금을 올리는 대신 근로장려세제를 도입했다. 닉슨은 또 인플레이션을 예방하기 위해 물가와 임금도 조정하며 시장에 개입했다. 이렇듯 과거 공화당은 보통 국민들을 외면하지 않는 정당이었다. 공화당이 과거 자신들이 만든 정책까지 부정하는 억만장자의 정당이 된 것은 현 부시 정권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바뀔 것이다. 다음번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화당은 부자, 기업인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대변해야 하는 압박을 다시 받을 것이다.

이=미국 대선 전망은 어떤가? 정책이 많이 바뀔 것으로 보는가?

프=현재 시장의 예측은 버락 오바마가 이길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이번 대선에서 누가 이기냐가 아니라 부시가 대통령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미국의 정책 결정은 보다 지적인 방향으로 나갈 것이고, 이데올로그나 억만장자가 아닌 보통 시민들의 행복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물론 오바마가 이기면 미국은 좀더 좌파 색채를 띨 것이다. 하지만 매케인이 이기더라도 국내외 정책에서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미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세계 금융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사태가 발생했나?

프=문제의 원인은 3가지다. 첫째 금융 부문의 적절한 규제가 부족했다. 단순한 규제완화는 위험을 낳는다. 둘째 헤지펀드 등 금융 기관에 대한 감시, 처벌 매커니즘이 전무했다. 헤지펀드가 돈을 굴리는 데 성공하면 엄청난 이익을 남기지만, 투자자의 돈을 잃어도 자신들은 돈을 잃는 법이 없다 보니 제도 자체가 투기를 부추기게 됐다. 셋째 미국 금융제도의 확률분포가 정상분포가 아니다. 떼돈을 벌든가 왕창 망하던가 하는 극단의 확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 그 결과 금융가에서는 ‘100년 만에 한번 찾아올법한’ 엄청난 위기가 10년마다 찾아오게 됐다.

이=지난 20년간 미국의 자본주의는 체질이 완전히 변한 것 같다. 금융공학이 발달하여 수많은 금융파생상품이 개발되는 등 경제의 금융화가 진행됐다. 2007년 미국 법인기업 이윤 중 40%가 금융에서 발생했다. 이 숫자가 1980년만 해도 10%에 불과했다. 20년간 경제의 금융화가 진행된 반면, 그에 합당한 규제를 하지 않고 규제완화에만 몰두했다. 이번에 터진 금융위기도 그 결과가 아닌가.

프=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시장안정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과거 모기지론을 내주는 동네 은행은 대출자의 가족 상황과 동네의 부동산 경기 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 미국 은행들은 모기지 대출을 외부 금융권에 팔아넘겼다. 보스턴에 사는 내 모기지론을 사들인 캘리포니아 은행이 직접 우리집에 찾아올 리 만무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소실된다. 정보 소실은 경제적 가치 하락을 낳는다.

애초 금융기관들은 모기지론을 서로 사고팔며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위험의 총계는 오히려 올라갔다. 나는 주택금융대출 등 미국의 전반적인 금융 규제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투자자가 돈을 잃어도 단순히 금융거래 수수료로만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는 제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금융파생상품은 미로와 같아서 이번 위기의 부실 규모도 정확히 파악이 안 될 정도다. 대략 1조 달러라고 추산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금융시장은 지난 20년간 호황이 이어지며 부채를 바탕으로 다시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사상누각을 키워왔다. 집을 담보로 빌린 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금융제도를 거쳐 가치가 급상승하였는데, 이는 거품이다. 이런 상황은 오래 동안 규제 없이 방치돼 왔는데, 이번의 위기로 사상누각이 일거에 무너지는 형국이 아닌가.

프=내 수수료로 먹고 사는 금융기관들은 내 돈의 장기적인 안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마치 의사가 환자가 죽은 다음 “돌아가셔서 정말 유감이지만 약에 대한 돈은 지불하셨군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는 규제를 통해 이런 금융기관에 일정한 책임을 부여하여, ‘비대칭적 인센티브’ (Assymetrical Incentive)로 요약되는 무책임한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한국에서도 노무현 정부 때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하고, 부동산가격이 폭등했다. 나중에 미국식 금융규제, 즉 은행에서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적용해 신규대출을 억제함으로써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비싼 집을 담보로 걸더라도 신규 대출이 억제되는 매우 강력한 정책이다. 이런 정책을 먼저 시행해온 미국에서 왜 서브프라임 사태가 일어났나?

프=미국의 부채상환비율은 개별 은행의 대출 정책으로, 정부가 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대출 과정에서 소득수준 등은 자연스레 반영된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은행들은 대출의 일부분만을 갖고 나머지를 외부에 내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사태가 이들의 손을 벗어났다. 이론상 보스턴의 은행이 캘리포니아 은행에 주택대출을 파는 것은 위험을 분산시킨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문제는 은행들이 수수료 장사에 치중하며, 대출 자체에 신중을 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익은 있었지만 규제는 거의 없었다.


시장 규제·감시 완화가 `서브프라임 사태’ 불러
국제유가 급등세는 미국 달러 약세 정책 때문



더욱 심각한 것은 모기지를 알선하는 주택담보대출 브로커들이 설치고 다닌 것이다. 집을 사려는 저소득층은 은행이 아닌 브로커를 찾아갔다. 브로커들은 “당신 신용으로는 지역은행에서 이만큼 대출받을 수 없지만, 대출 받을 수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며 대출을 알선했다. 브로커들은 거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대출이 잘못되더라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들이 대출 알선 수수료로 이익을 남기다보니 주택담보대출이 폭발했다.

이=최근 금융위기로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각에서는 오래 동안 미국 금융계를 호령하며 영웅 대접을 받았던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이에 동의하는가?

프=지나 놓고 보니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는 판단이 어려웠을 것이다. 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이 10%라고 보고를 받을 때 그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실은 그 확률이 30%였다고 하면 이럴 때 최고 의사결정자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지 않겠나. 하여튼 지금 버냉키 연준의장은 분명히 영웅이다. 그는 결단을 내려 위기를 타개해가고 있다.

이=버냉키 연준의장이 금리를 파격적으로 내려 급한 불을 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금리 인하는 약한 달러의 가치를 더욱 낮추어 자본이 미국에서 유럽과 중동, 중국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경제의 어려움을 심화시키고 있다. 금리 인하 정책이 응급책으로 필요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도 옳은지는 의문이다.

프=달러 가치 하락은 현재의 서브프라임 위기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싼 달러에 미국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게 된 유럽과 중동에서 돈이 몰려올 수 있다. 일본이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였던 1980년대 같은 상황이 재연될지도 모른다.

이=저금리가 낳은 달러 약세 때문에 달러에 연동된 유가나 자원가격이 연이어 폭등하고 있다. 이것이 다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가져오고, 다시 달러 약세를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유가 및 곡물가 폭등으로 인한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 위협도 심상치 않다. 비록 가격 인상률은 1970년대보다 낮지만, 절대적 인상 폭은 그때보다 크다.

프=달러 약세가 야기한 세계적 위기의 해법은 결국 석유와 달러의 연동을 깨는 것이다. 중국이 천연자원의 주요 구매자인 상황에서 석유가 달러에만 연동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안으로는 유가가 달러 단일이 아닌 복수 통화의 시장가치와 연동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며 유럽인들은 물가 상승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 유가가 급등하면서 석유세 인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힐러리와 메케인은 여름 동안 한시적으로 석유세 인하를 하자고 주장하고, 오바마는 이에 반대하는데, 경제학자들은 압도적으로 오바마를 지지하고 있다.

이=오바마가 옳다고 본다. 한국에서도 최근 유가 급등 대응방안으로 정부가 쥐꼬리만큼 유류세 인하 조처를 취한 바 있다. 이것은 가격의 신호 기능을 왜곡시키므로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 전형적 인기영합주의다. 근본적 대책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면 현재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는가?

프=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크게 높지는 않다. 세계적 동반불황 가능성이 30% 쯤 된다고 본다. 유가가 폭등하는 등 어렵긴 하지만 아직 1970년대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고유가는 친환경 기술과 에너지 개발을 촉발해서 부담을 줄이고 있다. 만약 부시가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면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가 떠나기 때문에 가능성은 낮아졌다.

이=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때 사회적 대화 모델을 취한 유럽 국가들이 비교적 쉽게 위기를 극복한 전례가 있다. 제2의 스태그플레이션이 온다면 여전히 그런 모델이 유효하다고 보는가?

프=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정답을 찾기 어려운 복잡한 현실이다. 한때 스웨덴이 정답 같았는데, 그 뒤 스웨덴도 위기를 맞았고, 한때 일본경제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장기 불황에 빠져 버렸다. 지금은 모범적 모델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 돼버렸다.

이=세계적 불황이 브릭스 국가, 특히 중국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는가? 중국경제의 장기 전망을 어떻게 보나?

프=중국이 경제 발전에 성공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도의적 의무다. 나는 현재 중국 노사문제에 관련해 자문을 해주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에게 ‘한국을 배우라’고 권한다. 한국은 중국에게 교훈과 반면교사 모두를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다. 한국이 이룬 경제성장은 개도국이 선진국이 되는 모범사례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나쁜 노사문제만은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장시간 대화에 응해 줘 대단히 고맙다.


캠브리지(미국 매사추세츠주)/

정리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0개의 댓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7 [아시아경제]고용부, 동서발전 메일서버 압수수색 노동조합 2011.03.23 1691
346 [기사모음] "민영화하면 공기업 직원수 7만명 줄 것" 노동조합 2008.05.23 1690
345 [0725 기사모음]한전.가스·석유·석탄공사 `이렇게 바꾼다` 교육선전실 2008.07.28 1679
344 [문화일보] 포토뉴스-새벽파업 발전노조 휴식 노동조합 2006.09.04 1670
343 [민중의소리] 산자부, 발전노조 탄압 직접개입 사실 드러나 노동조합 2006.09.08 1666
342 [매일노동뉴스]"박근혜정부 공공부문 민영화 은밀, 교묘, 우회 추진" 노동조합 2013.05.28 1660
341 [1202기사모음] 에너지공기업 조직개편 소용돌이 노동조합 2008.12.02 1651
340 [0529 기사모음]경유 대란 '대책 없는' 정부 교육선전실 2008.05.29 1643
[한겨레] “FTA, 미국에 유리…더 얻으려 재협상 요구할듯” 한-미 경제학자 대담 노동조합 2008.05.28 1641
338 [오마이뉴스] "파업이 전력대란 일으킨다? 천만에" 노동조합 2006.09.04 1639
337 [매일노동뉴스]"공공기관 신입직원 차별 철폐투쟁 나서겠다" 노동조합 2011.05.18 1639
336 [매일노동뉴스] 발전노조 조합원 '노조 탈퇴요구 스트레스'로 쓰러져 노동조합 2011.08.12 1629
335 [민중의소리] 총파업 D-1 발전노조, 고려대에서 전야제 노동조합 2006.09.04 1627
334 [참세상] 발전노조는 왜 파업을 선택했나 노동조합 2006.09.04 1624
333 [매일노동뉴스] 강제출장에 봉사활동까지…발전회사 파업방해 사실로 드러나 노동조합 2009.12.24 1621
332 [매일노동뉴스]"초임삭감 원상회복 안 되면 반정부 투쟁" - 양대노총 공공부문 대정부 공동투쟁 선언 노동조합 2011.04.08 1619
331 [0904 한겨레]전력산업 선진화정책은 민영화 띄우기 교육선전실 2008.09.08 1618
330 [0915 기사모음]3차 공기업개혁..에너지 공기업 '수술' 교육선전실 2008.09.16 1616
329 [민중의소리] 동서발전, 노조파괴공작 및 은폐시도 폭로돼 노동조합 2011.01.29 1615
328 [민중의소리] 기업별노조를 획책하는 발전회사의 복수노조 문제점 노동조합 2011.07.13 1601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