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정치시평]민심인가 공안인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523만 몇 천 몇 개의 벽돌.’ 진보운동의 절정이었던 1990년대 초, 유학에서 돌아와 취직한 한 대학에서 발견한 팸플릿의 제목이었다. 운동권 학생회가 신입생들 교육을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건설현장 현지지도를 나와서 “저 공장을 짓는 데 (정확한 숫자는 잊어버렸지만) 523만 몇 천 몇 개의 벽돌이 들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대로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건을 읽고 유치한 개인 숭배에 너무도 충격을 받았다. 이후 과거사 진상 조사 일을 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소위 주체사상파(주사파)들이 김일성 주석에게 충성 맹세문과 생일선물을 보낸 것이 조작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또 한번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건전한 지성과 상식이 마비된 ‘사이비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러나 충격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내란행위가 아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유엔인권협약의 자유권은 주체사상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틀린 주장도 할 수 있는 자유’의 보장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주장이 틀렸다고 억압하면 다른 사람들도 내 주장이 틀렸다고 억압할 수 있다. 따라서 주사파의 사상의 자유도 보장되어야 하고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 김정은 만세”를 불러도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래봐야 결코 체제의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국민들에게 “미친 놈” 취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소위 주사파들부터 북한에 가서 살라면 못 살 것이고 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권력이나 공안논리가 아니라 민심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검찰의 개입은 이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물론 통합진보당은 지난 총선에서 10%가 넘는 240만표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당을 이끌어온 당권파는 주사파로 의심을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240만명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체사상에 동조해 표를 던졌겠는가? 시선을 통합진보당, 나아가 당권파로 좁히더라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 당원 중 당권파 지지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어림잡아 4만명이라고 치더라도, 이들 중 몇 명이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일까? 사실 당권파라고 지칭되는 세력의 경우도 공안당국이 우려하는 주사파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국가보안법과 공안논리가 이들이 지하에서 자신들의 실체를 감추고 위장된 형태로 움직임으로써 대중을 호도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주사파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한 뒤 다양한 진보세력들이 북한과 한반도 문제, 주체사상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하게 하고 국민들이 이를 보고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경우 주사파는 몰락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도 그러하다. 이석기를 비롯한 당권파는 비상식적인 언행이 폭로되면서 고사 직전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출당 조치를 피하기 위해 경기도로 주소를 옮겼지만 이는 위장전입 논쟁으로 비화돼 여론은 더욱 싸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인 민심의 심판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들이 자꾸 문제를 종북주의로 몰고 가고 이들을 겨냥해 검찰이 공권력을 동원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당의 고발도 아니고 외부 제3자의 고발을 받아 정당 내부 문제에 검찰이 개입하는 것은 위험한 전례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문제 해결에도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물론 검찰이 당권파의 부정선거와 비도덕성에 대한 결정적인 물증을 포착해 이들에게 최후의 한방을 날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검찰의 개입이 이들을 공안논리의 희생자 내지 순교자로 생각하게 만들고 진보적 유권자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까봐 걱정이 된다. 게다가 검찰이 이번 수사를 종북주의 문제로 끌고 갈 경우 그 같은 동정심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주사파에 대한 해법은 공안이 아니라 민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