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새시대를 위하여 - 5. 정부, 이제는 변해야 한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일 수 밖에 없다. 노동자가 더 나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바라고, 사용자는 비용절감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정부는 노사가 입장을 제대로 조율할 수 있도록 돕는 심판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공정한 심판일까 우리의 법과 제도는 참여·협력적 노사관계에 보탬이 되고 있을까
올들어 2~4월의 발전파업, 5월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병원파업 등 장기 ‘불법’파업이 이어졌다. 파업이 장기화되는 데는 노조만큼 사용자도 책임이 있을 텐데 노동자와 사용자에 대하 처벌은 너무 차이가 크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올들어 10월까지 파업과 관련해 구속된 노동자는 165명이고, 6월까지 사업장 39곳에서 손배소를 통해 조합비와 조합원 월급 1264억9539만원이 가압류됐다. 그러나 9월말까지 교섭회피, 노조 활동 불이익 처분, 노조활동 개입 등 부당노동 행위로 고소 고발 진정된 821건의 사건 중 구속된 사용자는 한명도 없다. 노동부 노사정책과 관계자는 “몇년 동안 부당노동행위로 구속된 사용주는 한명도 없었다. 사장을 구속하면 회사 운영에 타격이 될까봐 구속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교섭을 거부한 기업주는 3년 이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는 노동조합법 조항은 있으나 마나다.
많은 파업에 대해 노동부는 입장은 “불법 파업이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엄단한다”이지만 불법파업이 많은 데는 잘못된 법과 제도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다.(상자 기사 참조)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불법 파업이 너무 많다는 것은 직권중재나 업무방해죄처럼 법 자체가 지키기 어렵거나 잘못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업 관련해 노동자를 우리나라처럼 많이 구속하는 나라는 없다. 법을 현실적으로 개정한 뒤 노사 모두 엄격하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병원, 발전소, 철도 등 공공부분은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돼 파업이 극히 제한되고 사기업에서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파업을 해도 업무방해죄로 구속되거나 거액의 손배소송이 뒤따른다. 김태연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은 “헌법 33조에서 노동 3권을 보장한 것은 노동자가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 파업 규정, 손배소, 업무방해 고소, 노동자 구속 등 정부와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내놓는 조처들은 이들이 노동기본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파업 현장에 대한 경찰 투입이라는 잘못된 처방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98년부터 매년 만도기계, 롯데호텔, 대우자동차, 보건의료노조 등에 경찰 투입이 이어졌다. 김태연 실장은 “정부가 교섭, 중재 등 평화로운 해결 노력이 필요할 때는 ‘노사관계는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팔짱만 끼고 있다가 사태가 악화되면 뒤늦게 경찰을 투입하는 관행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 고용 관련 정책을 결정할 때 노동계의 의견을 거의 수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결국 노동계의 큰 반발과 연대파업을 불러오고 있다. 최근 파견 노동을 확대하고 월차휴가를 폐지하고 생리휴가와 일요 휴무를 무급화하는 등 노동조건의 큰 변화를 불러오는 경제자유구역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재경부가 뒤늦게 형식적인 공청회를 한번 연 게 노동계와 대화한 전부”라고 민주노총 이회수 대외협력실장은 전했다.
당사자인 공무원노조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은 채 만들어진 정부의 공무원노조법에 대해서는 정부 안에서도 행자부가 너무 심하게 밀어부친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노동부의 한 간부는 “행자부 장관이 공무원의 사용자인데 노조를 관리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노동권을 허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데 행자부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 전체 노동조합 체계 속에서 공무원의 특성을 살려 운영하는 게 좋지 노조라는 명칭조차 금지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노동부 관계자들은 정부 안에서도 노동정책이 경제 정책의 부속물로 취급돼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 놓는다. 노동부의 한 국장은 “관계부처 장관회의가 열리면 노동부 장관이 14:1로 밀린다. 노동계는 노동부를 욕하지만 정부 분위기에서 경제일방주의가 심하다”고 말했다. 올초 노동부는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문제가 많은 산업연수생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을 허가하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산자부, 중기청 등과의 협의 끝에 오히려 산업연수생을 확대하는 정책이 발표됐다. 직장인들의 노후 대비 수단인 법정 퇴직금을 대체할 기업연금제도는 재경부가 “주식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도입을 주도하고 있다. 김훈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동 정책의 위상이 경제정책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정부의 경제 일방 논리가 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정부부처 산하 공기업들의 구조조정이 계속돼야 할 현실에서 경제부처들의 밀어부치기식 관행은 노사 갈등의 축을 노정 갈등으로 옮겨 놓고 있다. 올해도 철도 발전 가스회사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앞으로 파업은 주로 공공부문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밖에 노동위원회나 각 지방 노동사무소의 공정성을 강화하고,1953년정규직 남성 제조업 노동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노동법을 비정규직 급증과 서비스업 종사자의 증가 등 새로운 고용시장에 맞게 바꾸는 것도 정부가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